말하는 건축가
내 생일날 본 영화!
비록 우리 둘째와 막내는 곯아떨어져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나랑 엄마는 눈을 반짝이며 조용하고 컬컬한 건축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이제는 고인이 된 건축가 정기용씨로, 좋은 학벌에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사람을 위하는 진한 인간미가 있는 할아버지다. 이 영화는 건축보다는 건축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건축가의 작품이 아닌 사상을 느릿하고 진득하게 잡아내었다.
정기용씨는 나에게 몽상가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직은 젊은 피가 들끓는 나이여서인지, 힘이 없어 행동보다 말이 긴 할아버지는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말하는 건축가라니, 참으로 적절한 제목이기도 하지). 하지만 그가 젊은 시절부터 갖고 있던 '사상적 감각'은 참으로 남들과 참 색달랐다. 이제야 화두가 되고 있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 건물의 외향이 아닌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맞춘 건축디자인을 오래 전부터 묵묵히 강조하고 또 실행했던 사람이라니.
나에게 강렬하게 남은 영화의 백미는 두 장면이었다. 첫번째는 정기용씨가 무주 안성면 동네 할머니들 옆에 앉아 조용조용히 면사무소 건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 있었던 장면. 그에게서 어떠한 권위도, 욕심도, 어색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기용씨는 면사무소 건물에 할머니들이 가장 원했던 '공중목욕탕'을 지어놓았다.
그가 거실의 소파에 앉아 두런두런 인터뷰를 하다말고 길쭉한 햇볕조각이 자신의 발치에만 닿아있는 모양을 발견하고는 기뻐하던 모습이 또한 기억에 남는다. 이런 작은 우연을 만나고 귀여워 못견디겠다는 듯 행복해하는 그의 얼굴이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다른 곳이 아니라 온전히 이 자리에서, 이 자리의 즐거움을 느낄 줄 아는 그런 모습. 그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