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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답십리의 파수꾼, 숨은 장인들



답십리, 그리고 답십리의 사람들을 찾아가다

답십리역 2번 출구. 싸늘한 겨울바람과 함께 회색빛의 낡은 건물들이 맞아준다. '삼희상가'라고 간판 붙은 건물 앞에 크고 작은 석상들이 옹기종기 놓여있다. 바로 '답십리 고미술상가'라고 불리는 동대문구 답십리의 모습이다. 고미술상가는 따로 떨어진 2동, 5동, 그리고 6동으로 나눠져 있으며 이백여 개의 점포가 들어서 있다. 주요 취급물품은 고가구, 민속품등의 옛 일상물건들부터 고가의 도자기나 그림 등 다양하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텅 빈 느낌마저 드는 이곳의 매력은 물건을 비교적 싼 값에, 주인의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여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월의 흔적을 촉감, 후각으로도 느낄 수 있는 박물관의 대안적 공간이기도 하다.

 

답십리 고미술상가가 서울의 숨겨진 보물이라면, 그 보물더미 속엔 우리의 것을 꿋꿋이 고집해 나가는 파수꾼들이 있다. 답십리, 장안평 일대의 장인들이다. 경인고전(삼희상가 2동 198호·02-2214-7678)을 운영하는 동시에 목공예 작업을 하는 나종명 장인의 인터뷰를 시작이자 계기로 자개공예, 화각공예 등의 전통기술을 이어나가고 있는 장인들의 작업실을 차례로 방문해 나가기로 했다.

 

살기 위해 시작한 목수 일

나종명 장인을 따라서 찾아간 그의 ‘공장’은 장안평의 골목길 건물 지하에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저기 놓여있는 연장, 수리를 기다리고 있는 고가구들 사이에 둘러앉아 인터뷰가 시작됐다. 올해 쉰 넷이신 나종명 장인은 전남 영암이 고향이다. 직업선택의 배경으로 ‘가문의 전통’ 등의 스토리가 나오리라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다니기 싫고 공부하기 싫어 무작정 등록금을 가지고 기차에 올랐다고 얘기를 꺼낸다. 안양에 있던 외가에 도착, 몇 군데 일자리를 전전하다가 결국 삼촌 밑에서 가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벌써 37년이라고.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싫으나 좋으나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고가구 분야로 전환하게 된 것이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였다. 옛날 가구는 수리를 하니 월급이 좋고 일이 편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자금을 얼마 모은 후, 81년 혜화동에 공장을 차렸지만 경험 부족으로 인한 제품 하자에 사업은 야반도주로 끝이 났다. 어렵게 직장을 구한 그는 서울미대를 졸업한 박창식 선생 아래서 인테리어 분야에 대해서 많이 배웠다고 한다. 이후 화곡동에 있는 박창식 선생의 공장을 없는 돈에 인수, IMF 즈음해 자리를 장안평으로 옮겨 지금까지 일해 온 것이다.

 

예술가요? 꿈에서도 그렇게 생각 안해봤죠

나종명 장인의 가게인 경인고전에 가면 담담하고 순박한 옛날 가구들뿐만 아니라, 인테리어에 접목시킬 수 있을만한 솟대나 아궁이 굴뚝 등의 고전적 소재들을 볼 수 있다. 모두 장인 자신이 조금씩 변형시키거나 용도를 다르게 해 만든 ‘작품’들이다. 선생님은 예술가나 다름없으시다는 우리의 말에, 그는 손사래를 친다. 그런 생각은 아예 ‘전멸’이라고. 단지 먹고 살기위해 이 길을 택했을 뿐, 거의 32년 동안 인생을 불평하며 살았다고 고백한다. 예전엔 목수라는 직업이 창피해 숨기는데 급급했다고. 하지만 한 5년 전쯤부터는 자신이 하는 일이 재미가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러다보니 이젠 목수라는 직명에 크게 개의치도 않는단다. 어떤 물건을 하나 완성하고 나면 혼자 조용히 뒤에 앉아 담배 한 대 태우며 이상하게도 도취가 되곤 한다는 나종명 장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작품이 예술이라기보다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남들이 만들지 못하는 물건을 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라 말한다. "집에서 처자식이 학비 달라고 졸라대는데, 무슨 놈의 예술이고 물려주고, 찾을 겨를이 없어요"라는 그의 말에서 이 분야의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는지, 세월과 땀의 흔적이 녹록히 드러난다.

 

고미술상가의 오늘

답십리 고미술상가는 1980년대 초 충무로, 황학동 등지에 퍼져있던 고가구점, 골동품 점들이 입주하며 조성된 곳이다. 국내 최대의 고미술상가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물품을 취급하는 인사동에 비해 훨씬 덜 알려져 있다. 나종명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기가 '전멸'이란다. 고가구 수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떠나, 오십군데 정도 됐던 공장이 이젠 열서너 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상가의 마음가짐도 문제가 있단 생각이다.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아파트에 들어갈만한 전통가구도 짜보고 하면 전망이 있는데, 그냥 오가는 손님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실정이라고 꼬집는다. 또한 동대문구와 한국고미술협회가 공동 주최해 열렸던 ‘제1회 고미술 상가 거리문화축제(2001년 11월 5일)’에 대해 묻자, 막걸리 팔고 가수 데려온 정도였을 뿐, 그게 무슨 축제냐고 반문한다. 오히려 문화회관 같은 것을 하나 빌려주고, 답십리 근방의 공장에서 한 집에 한 품목씩만 물건을 내도록 해서 전시하면 지역홍보도 되고 장인들 솜씨도 뽐낼 수 있을 것이라며 내내 안타까워했다.

 

된장찌개 같은 우리나라의 고가구

답십리 고미술상가와 '한국적인 것'이라는 전통색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러나 예전과 비교했을 때, 이젠 많은 사람들이 중국 물건을 가져오면서 상가 각각의 특유색이 흐려지고 천편일률적이 되어 버렸단다. "외국 사람들이 와서 원하는게 뭐냐, 한국적인 거예요. 가구 자체가 사라지는게 문제가 아니라 한국적인 것이 사라지는 거죠." 그렇담 장인이 생각하는 한국 고가구의 아름다움은 무엇이냐 물었다. 그는 고가구를 '된장찌개'에 비유하며, 서양가구는 화려하지만 금방 싫증을 느끼게 되는 반면, 고가구는 별로 좋지는 않을지 몰라도 된장찌개처럼 무던하게 오래가더라고 말한다. 특히 자연적인 나무 흐름과 조화되는 멋이 있다고. 그러나 옛날의 물건들에 비해 지금은 그렇게 시간과 공을 들여 정교하게 만들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나종명 장인은 자신도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꾸준히 옛것을 접목시킨 생활가구로 연구를 하고 있으며 그 시장에서 가능성을 보고 있다.

 

지하작업장의 숨겨진 열정을 찾아

'전통'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편견의 회색빛 먼지는 이제 훅훅 불어버려도 되겠다. 전통, 그리고 '한국적인 것'은 과거에 국한된 특별한 것만이 아니라 나종명 장인과 같은 파수꾼에 의해 지켜지고, 또 창조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답십리 고미술상가의 오래되고 허름한 지하작업장으로부터 피어오른 열정들이 새로운 문화의 활력소로 자리잡길 바라는 마음으로, 답십리의 첫 번째 인터뷰를 갈무리한다.

 

 2008-01-16 [상상기자단] 네덜란드로 떠나는 바람에 내가 썼던 기사는 아쉽게도 이 한 편으로 끝나고 말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