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에서의 드래그킹 워크샵 후기]
우선 어머니, 아버지의 심장이 안녕하시기를 빌며. 두번째론 자칫 우스개처럼 보일 수 있는 제목이지만, 필자가 안고있는 물음표의 핵심을 직설적이고 담대하게 전달하고 있을 뿐이란 점을 안내해 드리고 싶다. 세번째부터는 본론으로 분류하여, 이만 서두를 서두르며 끝낸다.
A night to let out the Drag King inside yourself.
Want to come dressed to the nines and hang out with us?
Want to get some help making yourself a King for a day?
(당신 속에 있는 드래그 킹을 내보일 수 있는 밤. 멋지게 차려입고
우리와 놀아보지 않을래요? 당신을 하루동안 왕으로 만들어 주는
도움을 받아 보고 싶지 않으세요?)
여성주의 단체에서 일하는 폴란드 친구로부터 이메일이 한 통 와있다. 그 중 'Drag King'이란 반가운 단어를 보고 난 환호성을 내질렀다. 며칠 전 'Experiencing Differences'라는 수업에서 알게 된 드래그퀸(Drag Queen)과 드래그킹(Drag King). 바로 '여장남자'와 '남장여자'를 지칭하는 용어다. 쉽게 말해 '성전환역할놀이'. 주로 동성애자들이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각시켜 하나의 쇼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으며, 영화 '헤드윅'에서 주인공 헤드윅이 여자 가발을 쓰고, 옷을 입고 퍼포먼스를 보이는 것이 드래그쇼의 일례다. 난 바로 "YES!"라고 답장을 보냈고, 4월 19일 COC Netherland(www.coc.nl)라는 성적다양성을 추구하는 모임(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트렌스젠더 등을 위한)의 워크샵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일. 몸만 가면 되는 것인줄 알았는데, '남자가 되기위한' 옷은 자신이 준비해 와야 한단다. 남자 옷, 남자 옷이라...아무리 뒤져봐도 내 옷장에 남자 비스무리한 것이라곤 없다. 그렇다고 남자인 친구들에게 "내가 드래그킹 워크샵을 가니 네 옷 좀 빌려다오"라고 말하기엔 왠지 부끄럽다. 실전의 전(前), 그러나 하나의 실전. 나는 결국 혼자 남자옷을 사러 쇼핑거리에 나섰다. 남자옷을 사보기는 커녕 관심있게 살펴본 적도 없는 난, 몇가게를 돌아본 뒤 자신감을 상실해 버린다. 게다가 남자 코너에서 옷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저 여자 혹시 드래그킹 워크샵 가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은 눈초리다. 결국 용기를 내어 가장 무난한 '남성용' 티셔츠를 골라 피팅룸에서 입어보고 구매까지 하는데 거의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저녁 여섯 시, 자전거를 타고 COC 건물에 도착. 같이 간 두 명의 친구를 포함한 우리 일행을 두 세명의 프로그램 관계자 분들이 맞아주신다. 워크샵 수업료인 5유로(7500원 정도)를 내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를 포함한 열 다섯명 가량의 학생들이 아담한 강의실 한 켠에 모였다. 곧이어 오늘의 강의를 진행하실 꺽다리 아주머니 한 분이 등장하신다. 네덜란드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네 명이나 있는 관계로 워크샵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꺽다리 강사님은 트렌스 젠더. 남성의 목소리 그대로 참 열심히 수다와 유머와 호들갑을 동시에 떠시는. 남성임과 여성임을 동시에 경험해 본 사람이기에 매우 기대가 된다. 다짜고짜 모두 일어나게 시키더니 둥그렇게 서서 '자아(persona)'소개를 하란다. 겉모습을 바꾸기 전에 우선 '자신 안의 남성자아'를 찾거나 혹은 형성하란 거다. 외국인인 나의 일행 몇 명을 뺀 다른 네덜란드 여성 동무들은 이미 드래그킹의 경험이 있는지, 아무 망설임없이 소개를 시작한다. 내 이름은 '스티브', 여자친구는 없지만 당연히 많은 여자들과 '인조이'한다, 내 이름은 '얀', 직업은 아티스트, 약간은 소심한 편이다, 난 '벤', 나이는 비밀, 싸움을 잘 한다...무슨 연기교육을 받았는지 태도마저도 진짜 남자 혹은 남자역할의 레즈비언(Butch)같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 순간 머리에 떠오른 것은 바로 인기그룹 빅뱅의 권지용! "하이. 아이엠 단(Dahn), 아이엠 패셔너블 메트로폴리탄 가이..." 메트로폴리탄 가이가 되고 싶었던 '단'의 결과는 안타깝게도 애중간한 남장여자로 끝났다. 연습이 부족했다.
'소년은 소녀보다 많이 울지만 여성은 남성보다 쉽게 눈물을 흘립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요?'라는 뼈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시작으로, 이번엔 남성들의 행동거지에 대해 설명 들어가신다. 남자는 자신의 주변영역을 크고 과장된 행동을 통해 확보한다. 앞에 달린 무엇(thing)에 대한 공간이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일동웃음!'했더니 바로 경고가 들어온다. 노노노, 남자들은 쉽게 웃지 않는다. 여자들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잘 짓지않는 건 물론이고, 웃더라도 피식 한쪽 입꼬리만 올리거나 아니면 아예 하하하! 크게 웃어야 된다는 설명이다. 물론 '어떤 남자이냐'라는 맥락이 생략된 것이기에 유머라고 넘겨들은 것이었으나, 워크샵 진행과 함께 정말로 이러한 '규칙'들에 신경쓰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에 더욱 깜짝 놀랐다.
드디어 겉모습 변신을 할 시간. 가슴을 묶을 압박붕대를 가져왔어야 하는데, 나는 굳이 필요치 않아(!) 친구를 도와만 주게 됐다. 화장실에서 돌아와보니 테이블 한 켠에선 사람들이 앉아 부산하게 뭔가를 자르고 얼굴에 붙이고 화장을 하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선 웬 스타킹과 솜들이 늘어져 있다. 갑자기 왜 스타킹이 등장해 있나 했더니 바로 헌 스타킹에 솜을 채워넣어 남성 성기를 만들라는 것이다. 쉬운 일인 줄 알았는데, 크기도 그렇고 모양도 그렇고 마음처럼 되질 않는다. 게다가 바지 속에 집어넣었더니 불편하고 계속 걸리적거리기까지 한다. 이런 당황스런 느낌일 줄은 차마 예상치 못했다. 이번엔 자리를 옮긴다. 왜 이렇게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나 했더니, 바로 수염을 만드는 재료 준비 중인 것이었다. 머리 끝을 조금씩 살살 잘라 모은다음, 코 밑, 턱 주변에 풀같은 것을 바른 후 펴 바른다. 이것 또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대체 수염이 어디에 분포되어 있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어 내 것은 너무 가짜 수염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 이 분야의 전문가님(?)들은 눈썹을 마스카라로 진하게 덧칠하고, 머리에 왁스를 바르는 등 정말 남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자신을 '드래그킹 매니아'라고 칭하는 친구의 완벽한 변신.
(본 글에서는 본인으로부터 사진 사용 허락을 받았음. 초상권의 이유로 무단 복제 및 사용을 금함.)
수염과 같은 외형적 변화만으로도 충분히 다들 남자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참 놀랍다. 여자들이 털 미는 것에 집착하고, 머리를 기르고, 입술을 빨갛게 칠하려는 것이 이해가 될 것만 같다. 그렇지 않으면 남자로 오인받을 지도 모르니까. 참 간단한 이유와 행동양식이다. 깨달음은 뒤로 하고 우린 남자됨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자기 사진이 인터넷에 허락없이 떠도는 것을 싫어하는 네덜란드 여성들이 많아 나의 친구들과 밖에 찍을 수 없었다) 그 모습으로 맥주 한 잔 하러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한 곳은 입구 위에 무지개 깃발이 휘날리는 레즈비언 바. 우리가 들어서자 다들 눈짓으로 물음표를 쏴댄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욱 완벽하게 남장을 하는 건데! 난 너무 범죄자 혹은 복학생(내가 이렇게 복학생에 대한 이미지를 안 좋게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이 되어버린 것 같다. 아무튼 이거 이거, 재미있다. 남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자신이 직접 남자가 되어 봄으로써 대답/생각해 보았던 드래그킹 워크샵. 남자와 여자라는 경계를 오히려 전복적으로 고정관념화(stereotyping)하여 그 안의 다양성에 대해 거꾸로 깨달음을 주는 것도 신선하다. 아무튼, 난 도시적 냄새가 풍기는 메트로폴리탄 가이에 대한 관찰을 더 심도있게 해야할 것 같다. 한국에서도 드래그킹 워크샵이 있으면 또 가보고 싶다!
2008-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