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각형의 눈



"텔레비전을 많이 보면 눈이 사각형이 된단다."


틈만 나면 텔레비전의 만화영화니 상품 광고에 넋을 놓고 빠져드는 우리 아이들에게 겁을 주느라고 자주 하던 말이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위협이 통하지 않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저희들의 동그란 눈이 정말 사각형이 되는 게 아닌지 거울 앞에 서서 은근히 걱정하는 모습을 이따금 볼 수 있었다. 


이 얘기를 서두에 꺼내는 것은 우리들의 눈이 실은 이미 사각형이라는, 다소 터무니없어 보이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다. 텔레비전을 많이 보아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배우고 책을 보기 시작하면서 우리 눈이 사각형이 된다는 말이다. 스무 평 서른 평 하는 평수로 얘기되는 우리들의 집과 잠자리와 밥상이 사각형이고, 이 글을 쓰는 책상과 컴퓨터 모니터가 사각형이다. 이 글의 분량도 사각형의 원고지 몇 매로 계산된다. 사각형 밖에서 나는 이 글을 한 줄도 이어나갈 수가 없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책이 사각형이고 우리를 사각의 방 바깥으로 데려다주는 책장 속의 책들과 텔레비전과 창문과 여행가방과 자동차와 돈이, 돈을 주고 사는 차표가 모두 사각형이다. 사각형의 지도를 손에 쥐어야 찾는 장소의 위치와 거리가 파악되고 조망이 가능해지고 방향이 잡힌다. 사진을 찍어서 내가 방문한 여행지의 살아 있는 모습을 사각형 틀 안에 붙들어놓아야 그 여행의 소중한 기억이 상실되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신분증과 그 속의 증명사진마저도 사각의 틀 속에 들어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접하는 온갖 것을 가급적 반듯한 네모꼴로 환원해놓아야 마음을 놓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네모꼴이 아닌 다른 형태의 종이와 책으로부터, 이를테면 줄의 중간중간에 매듭을 묶어서 선의 형태 위에 정보를 기록하는 데서 세계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더라면, 이와는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읽는 우리 눈과 의식은 어쩔 수 없이 사각형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세계가 원래 사각형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사각형이다.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눈이 사각형인 것이다.


(중략)


우리가 자라면서 십수 년 간의 교육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틀 안쪽에 관한 것이다. 세계로부터 사각틀의 바깥쪽을 잘라내버리는 일이다. 가나다라...... 글을 배운다는 것은 허공을 통과하는 연속적인 말소리의 분할과 편집을 통해, 달아나는 시간을 공간적으로 번역해 붙들어놓는 법을 배우는 일이고, 나아가 그 번역의 편차를 묵인하거나 무시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글을 못 배운 사람을 까막눈이라 하지만 글을 배우면서 우리는 이러한 사각형의 틀 밖에 대해서 까막눈에 가까워진다. 그 틀 안에 들지 않는, 작업대 위에 올려놓으면 자꾸만 미끄러져 시야를 벗어나는,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또다른 세계, 사물들과 이미지의 세계는 우리에게 블랙홀이 된다. 매일매일 엄청난 양의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현대의 삶 속에서 우리가 수동적이고 현혹당하기 쉬운 소비자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이미지들은 사각형의 접시에 담겨져 우리에게 제공된다. 이처럼 편안하게 소비할 수 있는 사각의 창틀을 벗어난 세계, 시각적인 이미지들 앞에서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사각형의 액자 밖으로 빠져나간 그림, 사각형의 좌대를 벗어난 조각, 문자언어로의 번역을 거부하는 미술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자조 섞인 비난을 던진다. 


미술만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예술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틀 밖의 세계를 관찰하고 사람들의 시야를 그리로 넓혀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미술을 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이러한 사각형 바깥 사물들의 세계로 우리의 시선을 옮겨보고자 하는 시도다. 그것은 우리들의 몸과 그 주변의 일상적인 사물들에 관한 일종의 답사기다. 가장 가까운 데 있는 우리의 신체조차도 건강과 미용, 섹스와 외모의 차원을 넘어서면 시야 밖의 낯선 세계가 되어 있다. 


(후략)



<그 남자의 가방> 中, 안규철 지음

이렇게 좋은 서문은 참 오랜만이군




그 남자의 가방

저자
안규철 지음
출판사
현대문학 | 2004-03-02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조각가 안규철이 [현대문학]에 정기적으로 실었던 수필을 책으로 ...
가격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