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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은 노래한다

 
아주 오랜만에 세계문학전집에서 뭔가 읽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적에는 너무 심심해서 더 이상 할 게 없어서 문학전집을 내키는대로 읽어제꼈고 그 안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모험을 시작했다. 쇼츠와 스마트폰 조합으로 더 이상 심심할 일이 없는 지금 독서는 나의 유일한 스트레스 탈출구다. 회사원1로 그냥 부품처럼 소진되고, 엄마로서 거의 내주기만 하며 내 자신이 텅비었다고 느낄때 이 책을 만났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무려 초등학교 4~6학년 즈음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에 아이가 셋이나 되어서 제목과 책 뒤에 나온 간략한 줄거리에 이끌렸던 것 같다. 엄마가 일을 하시며 세 아이를 돌봐야하니 얼마나 힘들었겠고 아이들은 사랑에 고팠겠는가. 그렇게 시작한 책의 내용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그 어린 마음에 비혼을 결심했던 생각이 난다. 다섯번째 낳은 아이가 거의 악마로, 엄마와 가정을 모두 파탄내는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로 인해 "내가 낳은 아이가 정상적이지 않으면 어쩌나"하는 걱정과 트라우마가 20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결혼 적령기에 학력이나 재력 모두 차치하고 "신체정신 건강한" 조건이 결혼고려 1순위였던 것도 뇌리에 이 책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현실적이면서도 묘사나 상황이 끔찍했던 기억이 생생하여 도리스 레싱의 다른 책을 찾아볼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임신출산까지 두번이나 끝난 상황이 되고보니 이제야 트라우마에서 풀려났는지 '도리스 레싱의 다른 소설이 있었다니, 몰랐네' 하고 첫 장 간략히 읽다 완전 몰입해서 끝까지 가버렸다. 역시 노벨상 작가는 다르다. 소설에서 호객 역할을 하는 첫 문장과 시작이 중요하다 느꼈다. 소설의 시작은 어떤 여성의 살해사건을 알리는 간략한 독자투고 신문내용으로 띄워진다. 그리고 그 내용에 뭔가 이상한 점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주변 인물로 하여금 말하고 생각하게 하여 독자로 하여금 숨겨진 이야기 속에 함께 빠져들게 한다.

  의문의 살인 사건

 리처드 터너(느게시의 농부)의 아내인 메리 터너가 어제 아침 그들의 농장 주택 앞 베란다에서 피살된 채 발견되었다. 경찰이 체포한 하인이 범행 일체를 자백했으나 그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귀중품을 노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독자 투고)

 
 

인종이 계급인 사회

 
소설의 배경은 남아프리카다. 이번에 처음 알았지만 작가의 성장배경도 남아프리카였던 것이다. 남아공 여행을 다녀온 가족의 말로는 아프리카 대륙의 빈부격차가 상상초월이라 한다. 공항에 내려 바로 차를 타고 빈민가를 지나치지 않게(종종 총격전이 일어나 살인사건이 빈번하다고 한다) 조심해서 교외의 숙소까지 가는데, 그 드넓은 땅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현지인(대다수 흑인)들이 사는 박스 같이 생긴 판자집이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거의 1시간 넘게 차로 그 풍경을 지나고 난 뒤 백인들이 사는 "안전한" 교외로 갔을때 이제서야 안심을 했다고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저택과 정원, 그 땅을 둘러싸고 있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담벼락과 첨단 보안시스템에 남아공이 안전한 곳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져서 또 무서웠다고 하였다.
 
그런 남아프리카에 사는 가난한 백인의 삶은 어떨까? 바로 주인공인 리처드 터너와 메리 터너가 가난한 백인의 삶을 보여준다. 리처드 터너는 아프리카의 다른 농부들처럼 땅을 무정하게 고갈시켜버리는 식으로 경작하지 않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여러 농사를 계속 운없게도 망쳐버리는 운이 없는 남자다. 우연히 한 번 도시에 나갔다가 어떤 여자에게 한 눈에 끌리게 되는데 바로 농부의 아내로 살기에는 아주 부적합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싱글로서의 삶에 매우 만족하던" 메리다. 메리는 가정폭력과 가난에 시달리던 유년시절의 기억에 의한 가족에 대한 깊은 혐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변인들이 자신에 대해 매력없는 노처녀라고 쑥덕거리는 뒷담화를 듣고 앞뒤재지 않고 가난한 리처드와 결혼해버린다.
 
혹독한 아프리카의 기후와 운(=능력)없는 남자에 자신의 삶을 맡겨버린 메리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그 어떤 것도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닫게 되고, 결국 삶을 놓아버리게 된다. 그런 그녀의 삶을 끝내버린 존재는 바로 메리가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우월하게 만들고 싶어 채찍으로 분풀이 한 적 있지만, 결국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자신이 굴복해버린 모세라는 흑인 일꾼이었다. 
 
터너 부부의 경작지를 내내 노리던 이웃 찰리는 소설 내내 터너 부부가 망하기만을 기다리지만, 메리가 제 흑인하인 모세에게 거의 그루밍 당해버린 정신놓은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갑작스레 터너 부부를 경제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한다. 이 부분이 너무 흥미로웠는데, 찰리라는 캐릭터가 갑자기 선해진 것이 아니라 "백인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찰리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듯 말했다.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이기심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도 놀랐다. 그리고 리처드에 대한 동정심만도 아니었다. 그는 남아프리카 백인들의 첫 번째 규율, 즉 '너희는 동료 백인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된다, 만일 그렇게 되면 깜둥이들이 자신이나 너희가 별 차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를 준수하는 것이었다.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사회의 가장 강한 공감대가 찰리의 목소리를 통해 나온 셈이어서 리처드는 거절할 여지조차 없었다. ㅡ 306p

 
비단 백인/흑인 인종문제에서만 국한될까? 그렇게 능력도 없고 게으르고 함께 일하는 흑인들을 노예취급하지 못해 안달이었던 터너 부부가 자업자득으로 그렇게 변두리까지 밀려나고서도 경제적으로 적어도 파산하지 않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힘 겨루기 문제가 있는 사회에서 어디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자신의 특권을 계속해서 누리기 위해 자기 옆 동료/성별이 아무리 무능력해도 감싸안는 것처럼... 결국 서문의 "독자투고"는 흑인보다 비참해진 백인의 모습을 가리기 위한 거짓임을 작품 말미에서야 알 수 있게 된다.
 

여성에게 결혼이란

 
<다섯째 아이>를 거쳐 <풀잎은 노래한다>를 읽으며 도리스 레싱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작품에 깊이 반영되어 있음을 느꼈다. 작가가 31세 때 출간한 <풀잎은 노래한다>, 69세 때 출간한 <다섯째 아이> 모두 여성들이 극도로 관심있고 또 두려워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바로 결혼과 출산(육아)다. <다섯째 아이>를 읽으며 내가 공포를 느꼈던 부분은 내 선택에 대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제어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낳은 아이가 만약 (소설에서는 상징적으로 악마처럼 표현되었지만) 장애가 있거나 성향이 반사회적이거나 뭔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신체적 혹은 인격적인 특징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불확실성에 대한 미지 말이다.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임신출산을 자기 삶의 옵션에서 제외하는 여성들(남자보다는 여자가 주로 주양육자가 되는게 현실이기에)이 많다.


결혼도 마찬가지로 인생을 불확실성 속으로 끌어들이는 중대한 요소다. 결혼을 그냥 "자기를 도와줄 사람 하나 얻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아주 단순하고 전통적인 남성관점에서 보면 불확실할 것은 하나 없다. 리처드 터너도 그런 심플한 생각 하나로 아내를 얻었다. 결국 행복한 결혼과는 먼 삶을 살게 되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거주지는 결정할 수 있었다. 현실적인 기반에서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계획(결혼생각)을 가졌던 리처드와 달리, 메리는 결혼이 자신을 '지금보다는 나은 곳으로 데려다주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가난한 농부와 결혼을 선택한다.

리처드가 아니었더라도 그녀는 어찌 되었거나 남자를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리가 만난 남자들 중에서 그녀를 매력적이고 특별한 존재로 대해 주었던 최초의 남자가 리처드였을 가능성이 높다. 메리는 자신을 매력적이고 특별한 존재로 대해 주기를 절실히 원했다. 사실상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 온 힘이었다고 볼 수 있을 남자에 대한 우월감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그러한 존재로 자신을 대해 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절실히 원해왔던 것이다. ㅡ 73p


자신이 우월함을 느낄 수 있는 존재와 결혼하길 선택한다는 심리묘사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나의 마음 한 켠을 찔렀다. 나도 일부분 그런 우월감을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위 '여자는 남자가 귀여워보일 때, 남자는 여자가 능력있어 보일 때 끝난거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미혼 여성들은 모두  결혼적령기에 말도 안되는 동정심(모성애?)으로 결혼상대를 찾아서는 안됨을 깨달아야 한다(결혼 후에도 마찬가지). 아마도 그 동정심은 내가 가진 사회적 처지가 그닥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또는 내가 그닥 애정을 느끼지 못했던 가까운 대상(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등 복합적인 감정에서 온 것일 수 있다.

실제가 아닌 환상과 결혼한 메리는 자기가 지긋지긋해하는 가난과 관련된 신호,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리처드가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다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들을 지속적으로 받지만 이 위험신호들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그저 가라앉는다. 도시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메리는, 그토록 자신이 우월감에 느끼게 하는 존재인 '보잘 것없는' 리처드에게 자신의 남은 인생을 위임한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날에서야 깨닫는다.

혼자서 그녀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배웠어야 할 교훈이었다. 오래전에 그 교훈을 깨달았다면, 그녀는 지금 이곳에 서 있지도 않고, 자신의 책임을 대신해 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될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힘없이 의존함으로써 다시 한 번 배반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ㅡ 343p

문학은 예술이다


세계문학전집으로 꼽힌 작품은 역시 다르구나를 새삼 느꼈다. 최근 <미키 7>을 아주 재밌게 하룻밤 사이 읽었던 것도 나에겐 약간의 사치였는데, '고전' 같은 소설을 여유있게 읽을 짬을 내기가 사실상 힘들다. 하지만 텍스트에서 오는 날카로운 통찰력, 심리묘사, 캐릭터와 배경 묘사를 접하며 소름돋게 이 이야기가 내 몸과 가깝게 느껴졌고 어떻게 작가가 서른 살의 나이에 단어와 문장들로 이야기를 이렇게 엮을 수 있었을까 놀라웠다. 노벨상은 정말 아무나 받을 수 있는게 아니구나. 이런 책을 도서관에서 공짜로 빌려볼 수 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AI가 고도로 발달한들 이런 감각적인 묘사와 통찰, 인간내면의 두려움과 우둔함을 다 표현해낼 수 있을까? AI는 차치하고 전반적으로 더 멍청해져가는 우리 인류가 이런 예술작품을 다시 나오게 할 수 있을까?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한다고 해도 효율성만을 쫓는 세상에서 이렇게 글자와 띄어쓰기만 이용해서 만드는 예술이 다시 가능할까 싶다. 문송하다는 말을 나 스스로 받아들였기도 하면서도 문학을 공부한 내가 스스로 너무 자랑스러웠다. 예술을 느낄 수 있는 힘이 내게 있음에 너무 감사한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