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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1019


밤늦도록 잠은 안오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요약하면 이런거다.


1. 너가 병신이고, 너가 잘못한거다.

2. 아님 내가 병신이고, 내가 잘못한거다.

3. 그것도 아님 우리 둘 다 병신이고, 시간낭비하지 말고 조속히 헤어져야 한다.

4. 서로의 병신같은 부분을 정상이라 믿고, 이해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1번과 2번과 3번과 4번 사이에 존재하는

오늘 하루, 지난 2년 동안의 과거, 상상가능한 미래의 모습을 떠올리며

남녀관계란, 결혼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우선 남녀관계란 '남'과 '여'라는 말 자체가 포함되어 있듯이

성적인 차이가 우선시되는 인간관계를 지칭할 때 사용한다.

연애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고 남녀가 서로의 성에 대한 매력에 끌렸을 때 성립이 되고 유지가 된다.

이 세상에 '남'과 '여'가 아담과 이브처럼 각 1개체씩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남녀관계가 존재하고, 남녀간의 만남과 헤어짐은 사실상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1의 경우에는 똥 잘못 밟은 경우라서 빨리 씻고 최대한 똥을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며,


2의 경우 (내가 똥인 것을 깨닫는 경우는 흔치 않으나)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사과를 건네는 것이 우선이다

앞으로 더 만날 지 만날 수 없을 지는 전적으로 상대방의 의사에 맡기면 된다. 


3의 경우 두 가지 케이스다. 첫번째, 두 사람은 모두 남녀관계를 맺고 유지할 능력과 의지 자체가 없다.

남녀 간 심리, 행동, 감정 차이를 이해할 능력도 없고, 아무리 겪어봐도 학습이 되지 않으니 별다른 수가 없다.

당장의 만남으로 성욕은 충족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외의 상대방 매력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병신됨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오래가지 못할 바에야 빨리 끝내는게 옳다.

두번째, 두 사람 모두 능력과 의지가 있었을지 몰라도, 그냥 그들의 만남이 애초에 잘못된 것일 수 있다. 

한 마디로 각 사람은 병신이 아닌데 환경(타이밍, 공간상 거리 등)이 아주 병맛이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두 사람이 빨리 관계를 끝낸 뒤 서로에게 더 만족스러운 파트너를 찾았을 때서야

자신들이 병신이 아니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정은 고통스러워도 결과는 해피엔딩일 수 있다.


마지막 4의 경우, 남녀관계는 도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오르는 과정은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듯이 고통스럽지만

그 과정에서 행복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 높은 곳에서 눈 깜짝할 순간에 다 내려올 수도 있다.


남녀관계는 대부분 1과 2와 3을 겪어본 뒤에야 4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느끼게 되는 것 같고,

물론 어떤 현명하고 운 좋은 사람들은 1-2-3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4로 직행하기도 한다.


그럼 결혼이란 무엇인가.

결혼은 위 남녀관계 4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것이다.

물론 1-2-3의 상태에서 주변의 나이에 대한 압박이나 과욕, 불순한 목적 등으로 인하여 결혼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남녀가 4의 상태에 이르러서야 결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즉,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있고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 때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가능'에 강조를 두는 것은, 만남과 헤어짐이 자유롭고 개인적인 남녀관계에 비해 

결혼은 매우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 국가에 필수적으로 신고를 해서, 온갖 세금과 재산 등등을 공적, 법적으로 관리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2. 아는 모든 사람들의 바쁜 시간을 좀 내달라고 청첩장을 만들고 멋진 예식을 준비하는 등의 수고로움을 들여

다른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의 남녀관계는 이것 하나로 끝입니다'라고 크게 외쳐야 한다. 실제로 끝이다.

3. 동양문화 특성 상, 갑자기 가족이란 것이 2배가 되는 것이므로 나와 익숙치 않고 어색하더라도

상대방의 가족에까지 신경을 쓰고 배려해야 한다.

4. 이제 아무런 제약없이 자유롭게 아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 가족을 형성할 수도 있다.

아이가 태어나고 성장할 때까지, 그 아이의 건강/교육/의식주/사회생활 등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위와 같이 최소한 네 겹까지의 사회적 허들이 결혼이란 것을 둘러싸고 있음에도

남녀관계 4를 통해 느껴지는 사랑의 확신이 너무 깊을 경우 결혼을 하게 된다.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바람직한 결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보다.

남녀관계 4에 이르렀는지 의문이고, 그래서 사회적인 여건을 뛰어넘을 마음의 준비가 잘 안된다.


결혼에 대해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겪어가며 배우는구나.


결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