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박근혜 정부의 맥거핀 외교
맥거핀 효과(MacGuffin Effect)라는 용어가 있다. 소수만 아는 영화계의 전문용어였지만 최근에 폭넓은 용례를 가지면서 알려졌다. 공포물과 스릴러물의 대가 앨프리드 히치콕이 즐겨 사용했던 기법으로 영화에 중요한 것처럼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줄거리나 결말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장치를 가리킨다. 이 장치는 영화 초반부에 복선이나 중요한 실마리처럼 보여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채로 끝난다. 감독들은 맥거핀에 대한 관객들의 예상을 역이용해서 영화에 집중하게 하고, 반전의 서스펜스를 통해 극적 효과를 끌어올린다. 간단히 말하자면 시쳇말로 관객을 ‘낚는’ 것이다.
맥거핀은 영화적 재미를 위한 천재감독의 창의적인 장치이지만 이것이 실제 현실에서 사용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요즘 언론들은 앞다퉈 실제 기사내용과는 거의 관련성이 없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용어들을 남용하면서 어떻게든 독자들을 ‘낚으려’ 한다. 정치권력 역시 이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는 그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마치 나라가 결딴날 일이 발생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사건들이 선거가 끝나고 난 후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사라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국민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묶어버리기 위해 사용하는 색깔론이나 북풍공작도 넓은 의미에서 맥거핀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보수세력에 의해 남용되는 바람에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나 또는 양치기소년 효과를 보이기는 했지만 현 정부 여당은 여전히 애용하고 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가 지난 1년간 보여준 새로운 유형의 맥거핀이 발견되는데, 이전과는 다르게 공포나 위기감보다 희망과 해결의 실마리를 던지는 방법이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는 국내정치의 여러 실패에도 불구하고 과반수의 지지율을 유지함에 있어 혁혁한 공을 세워왔다. 하지만 잘 따져보면 대부분 외교수행의 실제 성과보다는 이미지에 집중되어있다. 난제들과 씨름하면서 해결하는 외교는 보이지 않고, 뒤로 미루거나 핵심에는 비켜있다. 광범위한 의제나 대형 제안을 던지거나, 마지막 목표점에 대한 언급에 집중하는 반면 구체적 과정과 실질적 해법에는 매우 소극적이다.
이런 행태를 종합해보면 박근혜 정부의 외교는 맥거핀이라는 추론에 이른다. 대북정책이나 외교에서 획기적인 제안을 던짐으로써 이목을 집중시키고 기대를 갖게 만들지만 결국 임기가 끝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냥 장치(?)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실패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게 만들었지만, 1년 만에 정부의 언술과 시야에서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일전을 불사할 것 같았던 강경한 대일외교도 힘없이 빗장이 열려버렸다. 통일대박론과 드레스덴 선언 역시 동일한 운명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박근혜 정부는 불과 1년 만에 다양한 외교담론을 만들어왔지만 어느 하나 구체적인 로드맵과 명료한 정책과 전략을 발견하기 어렵다. 대북정책은 물론이고 외교에 있어서 대통령의 개인선호 외에 합리적인 정책결정 시스템이 부재하다.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각종 외교행위가 맥거핀 장치라면 대통령이 진짜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국내정치라는 의심이 들지만 대통령도 생각해 둔 결말이 아예 없거나, 결말은 있지만 맥거핀 남용으로 인해 극적효과가 사라진 블랙코미디가 되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심각한 것은 영화는 끝나면 현실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외교현실은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화려한 무늬는 있으나 실체적 내용은 없는 맥거핀 외교 속에서 민족의 운명과 국익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점점 위기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다는 걱정이 기우에 그치기를 바랄 뿐이다.
<김준형 | 한동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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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대피 역학
미국에서는 2001년 9·11테러 이후 ‘대피 역학(Evacuation Dynamics)’ 연구가 활발하다. 특정 지역이나 건물, 선박, 항공기 등에서 재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대피시켜 인명피해를 줄이는 방안을 모색하는 분야다. 갈수록 건축물의 규모가 커지고 구조는 복잡해지며, 스포츠·문화·연예 이벤트 역시 대형화하는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물론 목표는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가능한 한 많은 인명을, 가능한 한 안전하게 구해내는 일이 될 터이다. 공간과 시간, 인간에 대한 다층적 이해가 필수인 만큼 공학과 건축학은 물론 물리학, 생리학, 심리학, 사회학 등이 연계해 학제적 연구를 진행한다.
목숨을 위협받는 재난 상황에서 인간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미국의 심리학자 노먼 그로너가 2004년 발표한 연구결과는 의미있는 시사점을 준다.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인간의 대응이 일반적 ‘상식’과 다르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너는 긴급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쉽게 패닉(공황)에 빠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대부분 두려움을 느끼기는 하나 이성을 잃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엊그제 뉴욕타임스에는 대피 역학과 세월호 사고를 연계해 분석한 글이 실렸다. 프린스턴대 방문연구원 에드워드 테너는 ‘한국 재난으로부터의 교훈’이라는 칼럼에서 대피 역학 연구가 아직 초기 단계라며 “세월호 침몰사고는 선박이나 빌딩을 소개(疏開)하는 일이 기술적으로나 인간의 판단 측면에서나 난제임을 일러준다”고 했다.
“선실에서 움직이지 말고 자리를 지켜달라.” 세월호 침몰사고를 돌아볼수록 안타까운 대목은 몇 차례나 되풀이됐다는 이 안내방송이다. 해난사고 전문가들은 “침수가 확인되면 탑승객을 갑판으로 대피시키고, 배가 급격히 기울면 바다로 탈출시키는 게 원칙”이라며 선장의 대응을 비판하고 있다. ‘인간은 재난 상황에서도 쉽게 공황에 빠지지 않는다’는 그로너의 연구결과를 생각하면 가슴이 더 답답해진다. 선실에서 구명조끼를 착용한 채 대기하던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다. 이 아이들에게 갑판에 나갈 기회만 줬더라면.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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