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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Zelig

젤리그
감독 우디 앨런 (1983 / 미국)
출연 우디 앨런,미아 패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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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인가? 나는 왜 주변 사람들을 닮아가는가?
자기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우디 앨런의 명작, <Zelig>



언제부터인가 누구때문이었는가, 보고싶은 영화리스트에 올라와있던 우디 앨런의 <Zelig>.
온라인 상에선 구할 수가 없어서 DVD로 주문까지해서 기어이 보고야 말았다.

젤리그는 우디 앨런이 직접 연기한, 영화 속 주인공 이름이다. 영화는 fake documentary 형식으로, 젤리그를 알았던 사람들이 그에 대해 증언하는 인터뷰로 시작된다. (문화비평가인 Susan Sontag도 인터뷰이 중 하나로 등장한다.)

젤리그는 부모님의 폭력, 형제들로부터의 폭력, 유대인이란 이유로 받은 사회적 차별로 상처투성이인 인물.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회에 편입되고 싶어하고, 관심을 받고 싶다. ("I want to be liked") 이러한 그의 열망은 극단적으로 표출되는데, 바로 자신이 대화하고 있는 사람과 점점 닮아가는 것이다. 성격이나 행동거지 뿐만 아니라 생김새까지. 뚱뚱한 사람을 만나면 젤리그의 배도 부풀어오르고, 흑인과 대화하면 흑인처럼 얼굴이 까매진다.
 


"인간 카멜레온". 그를 실험대상으로 연구하기 위해 보호감금한 사회와 대중들이 그에게 붙인 별명이다. 가족이랍시고 나중에 그를 데려가는 사람들은 그를 엔터테이너로 이용, OSMU의 중심에 선 스타 - 혹은 구경거리 - 로 만든다. 돈을 수없이 많이 벌지만 정작 젤리그는 무개성(devoid of personality), 비인간(a non person), 연기하는 괴짜(a performing freak), 궁극적인 순응자(the ultimate conformer)라는 평을 듣는다.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자원한 한 여자가 있었으니, 플레쳐 의사는 인간적으로 젤리그에 대한 연민을 갖고 보호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녀와 상담을 할 때마다 젤리그는 "자신이 정신과 의사"라고 주장하며 의사를 곤란케 한다. 도무지 대화나 심리치료가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는 갑자기 반짝!하고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한 장면이며,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젤리그 박사님, 저 문제가 하나 있는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물론 노력해보겠습니다만"
"제가 지난 주말에 사교모임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모두가 소설 모비딕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저는 모비딕을 읽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섞이고 싶은 마음에 거짓말을 해버렸어요!"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예요"

"젤리그, 그리고 저는 사실 의사도 아니예요"
"의사가 아니라고요?"
"의사가 아닙니다. 저는 의사인 척 하고 있었던거예요. 제 친구들이 다 의사라서 그들과 친한 체 하고싶어서 그랬던 것 뿐이예요"
"그건 좀...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젤리그 당신은 의사니까 저를 꼭 도와주셔야 해요"
"...사실...몸이 좀 안좋네요..."
"제 모든 인생이 거짓말이었어요. 저는 어떤 것인 척 하다가 또 다른 어떤 것을 흉내냈어요. 지난 밤에는 제가 불꽃으로 떨어지는 꿈까지 꿨답니다"
"끔찍하네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정신과 의사잖아요!"
"저도 의사가 아니예요. 아니예요! 젤리그가 누구인가요? 나는 아무도 아니예요, 아무것도 아니예요!" 

멘탈붕괴가 된 젤리그를 최면요법을 통해 깊은 기억까지 이끌어낸 플레쳐 의사는 그가 사랑과 무조건적인 보호를 통해 자아를 재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아낸다. "당신은 당신이어야 한다"고 자꾸 말해주는 것이 치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결국 젤리그가 "내가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도 될까요?"라고 말하게까지 이끌어내는 성과를 보인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플레쳐 의사의 치료는 너무 효과적이어서 다른 사람이 인사치레로 오늘 날씨가 좋다고 말한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히는 "과잉의견over-opinionated"의 경지까지 이르게 된다. 우디 앨런의 유머가 정말 세련되고 천재적인 것 같다.)

재기한 젤리그가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는 장면도 인상깊었다. 다른 사람이 너 자신이 갖지 못한 대답을 알고있는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지는 말라고. 자기 스스로의 주인이 되라고. 스스로의 마음 속으로부터 생각하라고. 자신도 파충류 족속에서 이제서야 인간이 되었다고.

젤리그란 인물을 통해 (개그맨으로 데뷔했던) 우디 앨렌의 엔터테이너와 대중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함께 할 수 있었고(우리는 가수가 연기도 잘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가? 개그맨이 다른 사람 흉내를 낼 때 배꼽빠지게 웃어대며 좋아하지 않는가?), 내 자신 속의 피플 플리저(people pleaser: 나보다도 남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무리하여 노력하는 사람)기질도 찾아낼 수 있었다. 물론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사고, 행동방식을 학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자아정체성이 덜 성숙된 사람에게는 정말로 스스로를 먼저 긍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타인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도 하지만 위험하기도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