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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이별도 할부가 되나요


벚꽃이 떨어지는 길 아래서 편지를 받았다.


이상하게도,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 


얼굴도 제대로 못봤고, 분명 걸음걸이도 왠지 어색했는데.


뭔가 이 남자가 내 인생에 들어올 것 같다는 느낌이.   


남자를 만날 땐 어떤 사람이든지 세 번은 만나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연애에 대해선 무지했던 난, 나에게 처음 몸짓을 한 남자와 세 번을 만났고 그가 좋아졌다.


특히 웃을 때 보이는 수줍은 보조개가 너무 좋았다. 


사진을 좋아하는 것도, 글을 잘 쓰는 것도, 라코스테 피케티셔츠도 좋았다.


하지만 나는 엄청 바빴다. 전공과목만 꽉 채워 듣던 학기.


카페에 가서 숙제를 하면 그 남자는 따라와서 옆에 앉아있었다. 


그 남자는 내가 지적인 매력이 있어 좋다고 했다.


나는 그가 혼동이 없도록 '하지만 나는 귀여운 스타일'임을 알려주었다.


서로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것 같다'라는 표현도 사귀자는 말과 같은 것이냐고 언니들에게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너무 연애초반에 자주 만나면 남자가 쉽게 질려버린다고, 헤어지기 쉽다는 조언을 들었다.


나는 이 남자에게 일주일에 두 세번이면 충분할 것 같다고 말했다.


둘은 학교 교정을 걷는 것을 참 좋아했다.


처음 산책을 시작한 날, 나는 떨어져있는 목련을 밟고 똥 밟은 것 같다고 했다.


이 남자는 나더러 똥 밟아본 적 있냐며 놀려댔다.


이 남자는 나를 학교 뒷산 벤치로 데려가 무슨 영화얘기를 했었다.


엄청 웃겼던 기억이 나는데. 무슨 영화였는지 기억이 안난다.


그 당시엔 난 정말 이상하게 옷을 입고다녔다. 


네덜란드를 다녀와서 살짝 맛이 갔던 것 같다. 아무튼 진짜 아무렇게나 입었다.


그래도 당시에 나는 아주 예뻤다. 


나는 페스티벌을 돕는답시고 또 바빠졌다. 


새로운 친구들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회의도 하고 소품제작을 하는데


문자가 왔다. 보름달을 보니 동그란 내 얼굴이 생각난다며.


그 남자는 내 손을 못잡고 걸어가며 계속 나와 부딪혔다!


왜 말을 못해! 내가 먼저 손을 잡았다.


우리는 같은 소규모 수업을 듣고 있었다.


아무도 몰래 눈빛교환을 하면 진짜 재밌었다. 


내 생일이었나. 다짜고짜 지하철로 끌려갔다.


지하철 사물함에서 꽃다발 한아름을 꺼내어 내게 안겨주었다.


여자친구가 생기면 커플티도 해보고 싶고 커플링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난 남자친구가 생기면 가장 하고싶지 않았던 리스트였다. 이럴수가.


하지만 결국 커플티는 두 번 다 내가 좋아서 사고, 커플링은 만들기도 전에 깨졌다.

    

나는 집에서 편식을 하다가 엄마한테 편식하면 성격 나빠진다는 소릴 들었다.


엄마처럼 편식하는 남자친구에게 핀잔을 주고 그의 기분을 엄청 상하게 만들었다.    


그의 걸음걸이도 지적을 했다. 어깨도 피라고 했다. 


그 남자가 당당한 모습이길 바랬다. 


약속시간에 대해서도 트러블이 생겼다.


나는 확실한 시간을 좋아하고, 그 남자는 종종 내가 그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강남역에서 한 시간동안 기다렸던 것이 생각나.


그는 다행히도 내 말에 잘 귀를 기울여주었고 내가 피드백을 주는 것도 긍정적으로 들었다.


나는 내가 너무 불만이 많은 것인지 궁금해 나는 뭘 고쳐야겠냐고 물었다.


그 때마다 돌아오는 답변은 '너 그대로가 좋다'는 거였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콩깍지를 빨리 벗겨내고 싶어졌다.


둘은 참 정적인 걸 좋아했다.


가장 기억에 남고 달콤했던 데이트는 북카페에서 같이 앉아 책을 읽는 거였다.


분명히 나 때문에 싸움이 났었는데, 무슨 일인지 이제 기억은 나지도 않고 


눈물이 글썽한 남자를 뒤로 한 채, 무지하게 화가 나서 지하철로 울며 걸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남자가 나랑은 결혼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화해했다.


나는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또 바빠졌다.


바빠진 사이 그 남자는 여자들이 많은 연합동아리에 가입했다.


처음 느껴보는 질투심에 난 마음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도 사회생활하면 입장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그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려고 했다. 잘못했다.


그 남자는 군대에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나는 '너 생각대로'라는 마음이었다.


그 남자는 군대에 가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게 당시에는 얼마나 큰 결정이었는지 알지도 못했고, 왜 그렇게 결정내렸는지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그 남자는 어떤 대학원을 가야할지 고민했다.


나는 '더 이름나고 조건 좋은 곳'을 추천했다.


그 남자는 포항이 아닌 서울에 머무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내 곁에 있기로 결정을 내린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행복했으나, 금방 까먹는다.


게다가 나는 북경으로 향했다. 중국어 배우려고. 취직 쉽게 하려고.


그래서 혼자 떠난다.


죽기살기로 중국사람되겠단 일념으로 중국어를 했다.     


그는 여전히 너무 다정했다.


이메일조차 달콤하고, 문자 하나도 간지러웠다.


크리스마스 날에는 내가 방 친구들과 노느라고 전화를 못받았다.


다음 날 이메일에는 그 남자가 나를 위해서 산타복장을 하고 크리스마스 케잌을 놓고 찍은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눈물이 나고... 지금도 너무 미안하고 고맙고 보고싶다.


나는 왜 가장 소중한 사람부터 챙기지를 못하는 걸까. 


왜 소중한 사람은 항상 거기 있을 것이라 생각해버리는 걸까.


영원한 건 없는데. 영원을 믿으면 믿을수록 더더욱.


소통의 문제가 생겼다. 서로 이메일과 문자와 통화가 뜸해졌다.


그는 내가 중국에 도착하는 날, 데리러 오지 않았고 


이튿날 만났을 때, 카레집에서 나를 보고 울면서 헤어지자고 했다.


본인 상황 문제가 힘들어 나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다는게 이유였다.


내가 제멋대로 연락을 하고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 또 다른 이유였을 거다.


나는 진심으로 뉘우치며 그가 행복하길 바랬고, 


이틀 밤을 눈물로 마음을 정리하여 편지를 한 통 부쳤다.


그 뒤로 전화가 왔다. 우리는 전화기를 붙잡고 울었고 다시 만났다.


하지만 나는 어리둥절했다. 이럴거면 왜 헤어지자고 했을까?


예전처럼 마냥 달콤하고 두근거리는 건 없었다.


하지만 편안하고 함께 있는 것 자체로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는 상태가 된다.


또, 또, 또. 나는 다시 한 번 바빠진다.


사회생활이 무엇인지 알게되고, 알게 되는 사람 알아야 하는 사람도 너무 많다.


그리고 곧바로 추락한다. 


딱, 기대를 마구마구 불어넣었던 환상의 풍선이 한번에 빵 터진다.


내가 알던 사회는 정말 특수한 집단이었음을 깨달으며.


발버둥을 쳤다. 그 발버둥에 맞은 것은 너무 미안하게도, 너무 눈물나게도,


나랑 놀러다닌 사람들이 아니라 언제나 항상 내 곁에서 있어준 나의 가족과 그 남자.


내가 헤어지자고 했다. 


삶이 너무 힘들고 죽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는 이런 나에게 연락이 없었다.


상황이 정리가 되고 나서야, 나도 그에게 연락할 정신이 들고 그제야 섭섭함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 그가 옆에 있어주지 않았다는 것이 커지는 것이었다.


이기적인 나,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던 것은 생각도 못하고


그가 나한테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는 것만 중요했다. 


나는 다시 시작하자 말할 기력도 희망도 없었다.


얼굴을 보고 '너에게 잘할 자신없다'고 박아버렸다.


헤어지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맞장구치는 그 남자를 보며 내가 잘 결정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쿨하고, 서로 합의 하에, 잘,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는데


왜 도대체 다시 그 남자가 보고싶어진걸까.


왜 그 남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걸까.


예전의 나처럼, 왜 헤어지자고 해놓고 이제와서 돌아가겠다는 거지? 


또 힘든 일 생기면 헤어지자는 말 나올 것 아니야? 생각할테지.


주변 사람들은 소개팅을 하라며, 남자는 여자가 잡을수록 정 떨어진다며, 하루라도 빨리 연락을 끊으라며


그래, 옳은 조언들을 하신다.   

     

하지만 이젠 조언이고 뭐고, 내 마음이 힘들어져도, 죽어도 표현하고 죽는게 후회없을 것 같다.


내가 헤어지자고 말해놓고 진짜로 헤어져야 하는구나 깨닫게 될 때까지 4개월이 걸렸다.


이별을 4개월 할부로 나누어, 조금씩 조금씩 헤어졌다.


갚아나가야 하는 마음의 분할량이 점점 작아지지 않을까 했는데, 고리대금인지 이자가 더 많다.  


내 삶이 안정을 추구하는 시기에 도달해 있어서 일 수도 있다. 


내가 아닌 것 같다고 하니까 더 좋아지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잘못한 것이 많으니까 그걸 어떻게든 다시 되돌려보이려는 미련일 수 있다.


연애의 아직도 두근거리는 기억들을 잃기 싫어서 일 수도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려는 노력을 안해서 일 수도 있다.


그가 오래된 물건처럼 내가 원하는대로 닳아져서 일 수도 있다. 


수 많은 일 수도 있다들이 있다.


분명한 건, 다 둘째치고. 얼굴마주보면 알게 될 텐데.     


그 남자는 이걸 알아서 나를 안 만나준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연락을 하는 것도, 


예전의 제멋대로인 내가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아서 나를 안 만나준다.


마음돌릴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아직도 조금 남은 할부금을 갚는다. 


할부금 다 갚으면 그 땐 어떻게 되려나.


내일 중국으로 며칠간 다녀옵니다.


가장 사랑하는 친구님, 주말 연휴 잘 보내고 건강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