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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맛




여름의 맛

저자
하성란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3-10-0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신체에 달라붙은 ‘모종의’ 느낌 취향이라 단정할 수 없는 독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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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못해 그녀는 그에게서 복숭아를 받아 들었다. 탄성이 날 만큼 복숭아는 크고 묵직했다. 바람이 코 위에 고여 움직이지 않았다. 금세 진한 복숭아 향이 그녀 주변을 꽉 채웠다. 포장 과정에서 복숭아 털도 말끔히 떨어낸 듯했다. 그녀는 그가 하는 대로 살살 한 입 베어 물 크기만큼만 복숭아 껍질을 벗겼다. 그를 따라 크게 입을 벌리고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복숭아는 다디달았다. 별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그녀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그런 그녀를 보고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베어물 때마다 입가로 과즙이 흘러내렸다. 복숭아 맛이라는 것이 이런 거였구나, 그녀는 새삼 깨달았다. 입가는 물론이고 코까지 복숭아 즙이 묻어 끈적거렸다. 복숭아는 체면을 차리면서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었다. 복숭아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 중 다른 하나가 바로 그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심지어 꽃게를 먹을 때조차 맨손을 쓰려 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양념투성이가 되는 데다 씻은 뒤에도 한동안 비린내가 가시지 않았다. 젓가락 끝으로 게딱지 속을 대충 긁어대다 어른들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그녀는 다시 입을 벌려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복숭아가 어찌나 단지 잇몸이 가려웠다. 복숭아에서 흘러내린 과즙이 손바닥의 손금을 타고 흐르다가 꺾인 손목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팔꿈치를 따라 흐른 과즙이 소매 안으로 스며들기도 했다. 과즙이 흘러내리지 모하도록 그녀는 허겁지겁 복숭아를 베어 물었다.


인적 없는 산책로에 두 사람의 복숭아 먹는 소리만 울렸다. 베어 물고 씹고, 흘러내리는 과즙을 쪽쪽 소리나게 빨아 먹었다. 다 씹기도 전에 꿀꺽 소리 나게 복숭아를 삼키고 다시 베어 물었다. 잇새에 낀 섬유소를 혀끝으로 빼낼 때는 바람 소리가 났다. 그들은 게걸스럽게 복숭아를 먹었다. 복숭아를 가득 입에 문 채로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복숭아를 우적거리면서 맛있다는 의미로 서로 고개만 끄덕였다.


- 단편 '여름의 맛' 중



고등학교에서 틀어주고 했던 EBS 교육방송 프로그램 중 단편소설을 짧은 드라마로 각색해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다. 그 코너에서 소개된 소설 '곰팡이꽃'이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다. 아파트에 사는 한 남자가 주변 이웃들의 쓰레기통을 뒤져, 관심있는 여자의 머리카락도 모으고 싫어하는 음식이 케이크라는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처음엔 '이런 골때리는 상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선명하게 내용이 떠올랐다. 현대사회의 익명성을 아파트와 쓰레기라는 소재를 통해 너무나도 적확하게 잘 표현했다는 생각에, 정말 오싹했다. 단편인데다가 제목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원작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고, 작가의 이름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이번에 신간 중 <여름의 맛> 소설정보를 보다가, 작가의 작품 중 '곰팡이꽃'이 있다는 것을 보고 불현듯 작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기억이 되살아나기 무섭게 바로 주문했다. '여름의 맛'은 타이틀로 선정된 단편. 미각에 대한 어딘가 깊은 추억을 글로 자꾸 건드리는 느낌을 주는 수작이다. 위 짧은 인용에서 복숭아 맛 자체(달다, 설익다 등등)에 대해 설명한 부분 하나 없어도 상황과 먹는 묘사만으로도 군침이 막 돈다. '맛'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하기 보다는, 누구나 경험했을만한 '맛을 보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감각이라는 개별성과 경험이라는 보편성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바로 이게 문학이지.


올해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카레 온 더 보더'는 첫 번째 읽었을 땐 '왜 이게 수상작이지?' 의문이 일었다. 두 번째 읽었을 때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맛집으로 소문난 한 카레집을 찾아간 주인공 '그녀'는 카레 냄새를 맡고 20대 초반 '영은인지 은영인지' 이름이 헷갈리는 친구의 집에 따라갔던 기억을 회상하게 된다. 한 눈에도 가난했던 그 집의 안방엔 거동이 불편한 다섯 명의 숨죽인 노인들이 영은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며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데, '노인네들이 풍기는 퀘퀘한 냄새' 속에서 영은이 요리해준 기가 막힌 맛의 카레를 그녀는 잊을 수가 없다. 



그녀는 겨우 스물두 살이었다. 대체 어떤 마음을 먹어야 팔뚝에 그런 단어를 새길 수 있는 걸까. 음식을 했던 부엌 싱크대 앞의 그 좁은 공간에 밤이면 영은이는 요를 깔 것이다. 요 위에 겨우 배게 두 개가 놓일 것이다. 소리 죽여 영은이는 남자 친구와 사랑을 나눌 것이다. 문도 없는 부엌의 자투리 공간에서.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안방 문이 빼꼼 열리고 열 개의 눈이 반짝거리면서 그 광경을 훔쳐볼는지도 모른다.


(중략) 빌라에서 조금 벗어났을 때에야 그녀는 4층 영은이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거기 먼지로 안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는 두쪽짜리 창이 있었다. 그 창 너머로 노인 다섯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비위가 상했다. 어제 저녁에 먹었던 삼겹살부터 차례로 들고 일어나는 듯 배 속이 요동을 쳤다.


그녀는 헛구역질을 하면서 비탈길을 내려왔다. 그녀가 그 골목 어딘가에 먹은 것을 게우지 않은 것은 다 카레의 위력이었다. 카레라는 향신료가 가지고 있는 강한 살균력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 시절의 카레맛을 잊지 못하는 것은, 카레가 죽음과 가난의 냄새를 잠시나마 가려주었기 때문이다. 그 죽음과 가난의 냄새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늙어버린 윗세대를 책임져야 하는 가난한 젊음에서 온다. 국민연금, 풍요로웠던 윗세대의 죽음과 가난을 젊은이들이 물려받아 지탱해야 하는 현구조. 수많은 '영은이들'이 지금 어딘가에서 노인들에 둘러쌓여 카레를 먹고 있을지 모른다. 미래를 믿지 않고, 지금만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은 어쩌면 이들에게 현실의 퀘퀘한 냄새를 가려주는 자극적인 '카레'가 필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회에 대입해 생각해보니 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하성란 작가는 사회를 문학의 상징성으로 엮어내리는 능력이 정말 탁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