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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창동의, 시

감독 이창동 (2010 / 한국)
출연 윤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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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 <시>를 보았다. 개봉 당시에도 이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 수도 그리 많지 않았는데 한 달 남짓 되고나니 벌써 막을 다 내려 예술영화관에서밖에 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원래 한 감독의 영화만을 주구장창 보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이창동의 영화는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그리고 금번 <시>에 이르기까지 벌써 네 편이나 보게 되었다. 가장 보기에 불편하면서도 인상적이었던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문소리가 장애여성의 역을 맡았던 <오아시스>다. <헤드윅>을 보면서 느꼈던 것처럼, '아, 이런 사랑도 가능하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했던 영화다. 아무튼 이창동의 영화들은 볼 때마다 같은 느낌을 준다. 일단 불편하다. 동시에 가슴에 응어리가 지며 답답해진다. 일단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세상의 주류 물살 위에 서 있지 않다. 미국의 히어로 영화라든가, 로맨틱 코미디 속의 예뻐서 감탄이 나올만한 여주인공이 등장한다든가, 아니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스토리라인이라든가. 모두 해당되지 않는다. 

<시>의 여주인공 양미자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서도, 주름이 생겨서도, 예쁜 것만을 보고싶고, 예쁜 옷을 입고싶은 소녀같은 할머니다. 미자 할머니는 이혼 후 부산으로 돈을 벌러 간 딸의 중학생 아들을 홀로 맡아 기르고 있다. 할머니는 동네 문화센터의 시 강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사과를 관찰하고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인지 고민한다. 그러던 중, 최근 손자가 다니는 중학교의 한 여학생이 강물에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곧, 자신의 손자를 비롯한 또래집단 여섯 명의 남자아이들이 학교 빈 교실에서 6개월 동안 그 여학생을 성폭행해왔으며, 그것을 일기장에 써놓고 여학생이 자살했음이 밝혀진다. 담임선생님과 교장, 일부 경찰 그리고 가해자 아이들의 부모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양미자 할머니에게도 여학생의 어머니에게 전해줄 보상금 '3천 만원'의 1/6에 해당하는 오백 만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입막음'을 위해서,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서. 

하지만 할머니에게 그렇게 큰 돈이 있을리도 없고, 다른 학부형(모두 남자)들이 '일단 보상금을 건네주면 일은 모두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양미자 할머니는 그 소녀가 겪었을 아픔 자체에 공감을 하기 시작한다. 내가 영화를 보며 가장 깊은 감동과 저림을 느꼈던 지점이었다. 성폭행 사건을 뉴스에서, 신문에서, 지인의 입으로 전해들었을 때 나는 같은 여자로서 치가 떨리고 사회 속 같은 약자로서 두려움과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남자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대체로 남자들은 역시 '나쁜 놈', '싹을 잘라버려야돼'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 같으나 그들의 몸이 느끼는 반응은 어떤지 모르겠다. 예전에도 성폭행 기사를 인터넷으로 보고 있다가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 적이 있다. 최근 여아를 성폭행한 흉악범에 대한 기사였다. 읽으며 가슴이 아프고 답답했던 나를 한 순간 일시정지시킨 것은 옆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던 수 십개의 성인광고였다. 성행위 중인 여자의 상반신이 절묘하게 잘라진 사진배너, '여자가 원하는 이상적인 남자의 크기는?', '그녀의 은밀한 곳' 등의 자극적인 문구가 기사를 읽는 내 눈을 따라 내려오는 성인광고들. 어떤 기사이든지 그 맥락을 잃어버리고 결국엔 남성의 성욕을 자극시키는 것과 동시에 존재하는 이런 세계를 목격하며, 사회가 성폭행을 유도하고 자극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아무런 죄의식도 보이지 않는 손자를 잡고 '왜 그랬어! 도대체 왜 그랬냐구!'라고 울부짖는데, 이 순간 나 역시 울음이 터져나왔다. 죄의식도 없고, 울고 있는 할머니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목석같은 손자. 이 손자녀석을 '남성의 성욕'이라는 '당연한' 연대의식이 지켜주고 있다. 혹여 이 놈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더라도 또래 남자학생들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서는 단체행동에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재차 말하듯, 이런 당연한 연대의식 때문에.

하지만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여성 자신의 성욕이 하나의 진리이자 신호일 뿐이다. 여자는 남성의 성욕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성욕을 따를 뿐이다. 미자 할머니가 성욕을 풀러 제 발로 장애할아버지를 찾아 걸어갔듯이. 다만 철없는 아이들의 성폭행과 할머니의 성욕이 다른 점은 상대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잘 지켜지지 않는 불변의 원칙이다. 

미자 할머니는 계속 되묻는다. 시 낭송회에 가서 옆 사람에게도 묻고, 시 강좌의 선생님에게도 몇 번씩이나 되풀이해서 묻는다. "시는 도대체 어떻게 쓰는 거예요? 시상이 어떻게 찾아오나요? 저도 마음 속엔 생각이 많은데, 시는 도무지 나오지 않아요". 그녀는 보는 사람이 답답해질 정도로 '진정성'을 끊임없이 되묻고, 자신 속의 목소리를 찾는다. 하나의 진실이 사라져버리고 대다수의 목소리들이 진실'들'이 되는 이 세상에서 더욱 진정성은 중요해지는 것 같다. 답보다는 어떤 질문을 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도 한다. 그녀의 질문은 내게 진득함과 끈기를 갖고 자만심에 빠지지 않을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었다.

영화의 끝자락에, 손자는 미자 할머니와 알던 경찰에게 잡혀가고 할머니는 아무런 놀람의 표시도 없이 배드민턴을 계속 친다. 삼 천만원을 전한 아버지들의 그 아들들 역시 돈으로 '처리'를 했음에도 '오점없는 장래'를 연기할 순 없게 되었을 것이다. 딸에게도 집으로 오라고 전화를 했으나 할머니는 집에 없다.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 시를 남기고 열 여섯살의 소녀처럼 스스로 죽음을 맞았을 것임을 영화는 암시한다. 착하기만 했던 그녀는 죽음으로, 열 여섯살의 소녀를 대신해서 모두에게 복수한다. 늙고 약자인 그녀가 남기는 복수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