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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내가난한발바닥의기록)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김훈 (푸른숲,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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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공부는 매우 복잡해. 개는 우선 세상의 온갖 구석구석을 몸뚱이로 부딪치고 뒹굴면서 그 느낌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야 해. 그리고 눈, 코, 귀, 입, 혀, 수염, 발바닥, 주둥이, 꼬리, 머리통을 쉴새없이 굴리고 돌려가면서 냄새 맡고 보고 듣고 노리고 물고 뜯고 씹고 핥고 빨고 헤치고 덮치고 쑤시고 뒹굴고 구르고 달리고 쫓고 쫓기고 엎어지고 일어나면서 이 세상을 몸으로 받아내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지. - 24 page

공부를 끝까지 잘 해내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바람이야. 머리끝부터 꼬리끝까지 신바람이 뻗쳐 있어야 한다는 것이야. 신바람! 이것이 개의 기본정신이지. 신바람이 살아 있으면 공부는 다 저절로 되는 것이고, 억지로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야. - 27 page

짖는 소리에는 위엄과 울림이 있어야 한다. 짖을 때, 목구멍에서 놋사발 두들기는 소리가 깽깽깽 나오는 개는 별 볼일 없는 개다. 소리가 목구멍까지도 못 내려가고 입 안에서 종종대는 개는 그보다도 못하다. 짖을 때, 소리는 몸통 전체에서 울려나와야 한다. 입과 목구멍은 다만 그 소리에 무늬와 느낌을 주면서 토해내는 구멍일 뿐이다. (...) 소리는 깊게 울리고 넓게 퍼지면서 무시무시한 겁을 주어야 한다. 그런 소리가 나와야만, 내 소리를 듣는 사람이나 짐승들이 내가 지금 장난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온몸의 힘으로 뛰쳐나와 들어붙을 자세를 갖추고 있음을 알고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는다. - 113 page

낮에, 바다의 냄새는 햇빛 속으로 가득 퍼졌는데, 바다의 밤 냄새는 물 위로 낮게 깔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냄새는 오직 바다냄새 한 가지뿐이었다. 한 가지 냄새뿐인 밤바다는 무서웠고, 뱃바닥이 흔들려서 나는 몹시 불안했다. 땅만을 딛고 살아온 나는, 흔들리는 바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그때 처음 알았다. - 158 page

겨울의 냄새는 맑고 투명하다. 겨울에는 산과 들과 나무에서 물기가 빠져서 세상은 물씬거리지 않는다. 부딪치며 뒤섞이던 냄새들은 땅속이나 나무들 속 깊이 잠겨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세상이 텅 빈 것처럼 콧구멍에 걸려드는 것이 없다. 그래서 쨍하게 추운 겨울날에는 멀리서 다가오는 작은 냄새가 한줄기 빛처럼 가늘고도 곧게 퍼진다. 겨울에는 가느다란 냄새들이 선명해진다. - 170 page




박웅현씨가 <책은 도끼다>에서 소개해 읽게 된 책. 이 책을 마치 작가 김훈이 개의 인생을 살아본 것인지 의심됐다고 평했는데, 읽어보니 정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개다. 대단하다.

아련하고 아름답고 서정적인, 개의 눈으로 본 사람세상과 자연의 이야기.
가슴이 시릴 정도로 문장들이 감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