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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군주가 된 피로사회. <군주론> vs <피로사회>



군주론(개역판)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출판사
까치 | 2003-05-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덕과 운명을 역설한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이 함축된 대표적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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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2-03-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성과사회는 우울증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피로사회』는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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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허공을 바라보고 소리를 지르는 거지아저씨를 보았다. 멀리서 봤을 땐 그냥 이상한 사람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앞을 지나며 그 아저씨의 또렷한 목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힘이 불끈불끈난다! 올해는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할 수 있어!"


허공을 바라보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서울역의 50대 거지아저씨였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건지, 슬퍼야 하는것인지 마음을 결정하기가 참 어려웠다.


고등학교 때 인상깊게 읽고, 최근 또 우연하게 손이 가서 읽었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이 책을 덮자마자 내가 좋아하는 언니의 추천으로 읽게된 것이 <피로사회>. 이 두 책이 미묘하게 맞닿아있어 포스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꾸 1분도 채 안되는 서울역의 작은 그림이 두 책의 내용과 엮어졌다.




<군주론> '군주'의 '민주화'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현실정치철학가다. 이 똑똑한 사람이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의 군주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친 글이 바로 <군주론>이다. 자신이 군주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선물이라며, "인민의 성격을 적절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될 필요가 있고, 군주의 성격을 적절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민의 한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의 정치컨설팅은 르네상스 버전 SERI CEO리포트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군주론이 500년도 더 넘은 현재까지 고전, 필독서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인간의 정치본성에 날카로운 관찰과 직관을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군주에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해행위는 단번에, 시혜행위는 천천히" 하라고 말한다. 이유는 사람들은 단번에 저질러지는 가해행위에 대해서는 감히 공포심에 복수할 마음을 품지못하고, 반면 남한테 받은 시혜행위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거나 팽개쳐버리기 쉽기 때문이라고.


성악설에 기반한 그의 통찰은 다른 부분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바를 행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를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잃기 십상이다. 어떤 상황에서나 선하게 행동할 것을 고집하는 사람이 많은 무자비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그의 몰락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필요하다면 부도덕하게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현명한 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때 그리고 약속을 맺은 이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약속을 지킬 수 없으며 지켜서도 안된다. 인간이란 신의가 없고 당신과 맺은 약속을 지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그들과 맺은 약속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는 항상 둘러댈 수 있기 마련이다.

 

현명한 통치자라면 평화시에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훈련, 대비, 연구 등의 활동을 통해서 부지런히 자신의 입지를 강화함으로써 역경에 처할 때를 대비한다. 그 결과 운명이 변하더라도 그는 운명을 견딜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다.      


군주론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을 일깨워준다. 무엇보다 내가 주목할만하다고 느끼는 것은, 과거에는 최고권력가에게만 몰래 바쳐졌을 이 책이 이제는 몇 세대에 걸쳐, 몇 개 국어로 번역되어, 너무도 쉽게 내 손까지 들어온다는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이탈리아의 정치천재로부터 군주교육을 받은/받기를 기다리는 이 시대의 '군주'들은 얼마나 더 많은 걸까?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함께 사회의 평균적인 지적수준 및 그에 따른 개개인의 권력지향수준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 성공하는 기업경영방식에 대해 분석한 글을 읽었다. 비결은 직원들 하나하나에게 CEO의 마인드로 일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이었다. 더 많은 결정권을 주고, 더 많은 책임을 지운다. 대왕CEO 밑의 작은CEO들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더 열심히, 효율적으로 일한다고. 앞으로 혼자만의 영역을 통치하는 CEO, 현대판 군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많아질 것같다.  




<피로사회> '피로'한 '군주'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적어도 항생제의 발명과 함꼐 종언을 고했다. 인플루엔자의 대대적 확산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더 이상 바이러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면역학적 기술에 힘입어 이미 그 시대를 졸업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피로사회>를 여는 단락이다. 첫단락부터 통찰력에 깜짝놀랐다. 신경증적이고 긍정성의 과잉이라는, 아직까지 그 누구도 명확히 진단내리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현 상태를 그는 짚어내고 있었다. 아픈 곳을 치료하려면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한병철이란 국내에는 매우 생소했던 재독 한국인 문화비평가에 의해 드디어 치료의 실마리가 풀린 듯하다. 


앞선 <군주론>은 개인에 대한 이야기다. 군주에 빙의한 개인이 어떻게 처세술을 통해 성공을 쟁취하고 결국 남들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할 것인가에 대한. 반면 <피로사회>는 개개인들의 공통점을 본다. 특히,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아프고' 있는지. 그리고 왜 아픈지.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적 맥락으로.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갈라놓는 규율 기관들의 장벽은 이제 거의 고대의 유물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권력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규율사회가 성과사회로 변모하면서 일어난 심리적, 공간구조적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요즘 자주 눈에 띄는 키워드 바로 '1인기업'.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나는 1인 기업의 CEO다> 등 관련 책이 무수히 검색된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 많은 부분 성과로만 사람의 승패를 판단하는 사회. 그 성과가 원해서 얻어진 것인지, 원하지 않았는데도 얻어진 것인지, 성과의 기준이 무엇인지에는 관심갖기 힘들다. 아마 성과를 낸 자신마저도 너무 이리저리 바빠서.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과잉긍정의 시대. 저자가 진단하는 우리 시대의 또 다른 키워드다. 우리는 자주 자기 자신의 '실적'을 남 앞에서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데카르트 시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였다면, 이제는 "나는 성과를 낸다(그리고 남들에게 알려 영향력있는 사람이 된다), 고로 존재한다." 권력배분 상, 어쨌든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을 뿐) 군주가 아직 아니거나 아닐 것이기 때문에 기회를 만들기보단 받게 된다. 결국 해야하는 일을 왜 해야하는지 묻지 않는 것이 습관화되고, 성과를 내는데만 집중하게 된다. Yes We Can을 무한정 외치며. 


그러나 인간은 분명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게 도덕관념을 통해 남에게 해가 되는 일,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구별할 줄 안다. 또한 인간에겐 스스로의 호불호, 취향 등의 판단을 가능케 하는 자아라는 것이 있다. 분명히 No, I Can't라고 외쳐야만 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진정한 긍정을 위해서는 부정하는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 어떤 것도 부정하거나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정신병이다.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외치면 남는 것은 우울증밖에 없다는 것이 <피로사회>의 관점.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활동적인 인간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정보'는 많은데 '이론'은 없는 시대. 인터넷과 모바일이 욕구를 바로바로 충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고, 그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정말로 더더욱 짧고 즉각적인 쾌락을 원한다. 빠른 콘텐츠 소비, 빠른 커뮤니케이션, 아무튼 뭐든 빠른게 절대선이 되는 시대. 많은 정보를 소비한다고 지능이 높아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알지못하면 뒤쳐지는 것이 되는 대중심리는 우리를 점점 ADHD 성향의 세계로 데려가고 있다. 이게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수가 정답을 만들어가는 세계가 분명있으므로 나도 함께 가고있다. 다만 앞만 말고 옆을 보며 우리 시대를 정리하며 가보려고 한다. 




인간의 행복에 관한 고전도서 두 편. 

나는 다른 점이 많은 두 책을 모두 인간의 행복에 대한 욕망이라고 읽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고전의 반열을 지키고 있는 <군주론>의 경우, 군주 외 대다수의 '노예'들이 자기주체성이란 말조차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쓰여졌다. 그러한 시대가 가고 르네상스가 도래하자 대다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신간이긴 하지만 나오자마자 고전의 자리를 넘보는 <피로사회>는 대다수의 행복하지 않은 군주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다. 군주가 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도대체 왜 그렇지 않은가.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의 군주가 행복을 되찾는 길은 자신이 군주가 아닐 수도 있으며, 아니어도 괜찮다는 '비움'의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결론이 책의 '진단'으로부터 유추된다. 


이쯤되면 왜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 미국에서 차문화와 요가가 그렇게 인기인지, 철학과 사상의 중심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넘어오고 있는지, 못알아차리면 바보되는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