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죽고 나서 상대방이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꼭 껴안고 함께 찍은 사진
바로 디즈니 만화에서도 보여주지 못했던 노년의 해피엔딩
가지보다는 줄기를 닮길 바라며,
요즘 지인들에게 권하고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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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의 경험의 성격이 똑같은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었어요. 그 경험의 의미는 당신이나 나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확실한 자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까요. 그 자리는 오직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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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둘 다 불안과 갈등의 자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보호해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었습니다. ㅇ리는 함께, 서로가 서로에게 힘입어, 이 세상에서 있을 자리를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애초부터 우리에겐 없던 자리를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리의 사랑이 사랑일 뿐만 아니라 일생 불변하는 계약이 되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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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사람의 첫째 목적은 그가 쓰는 글의 내용이 아닙니다. 그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쓴다는 행위입니다. 쓴다는 것은 세상에서 사라지고 자기 자신에게서 사라져서 결국은 세상과 자기 자신을 문학적 구상의 소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다루는 '주제'에 대한 문제는 그다음에야 제기되는 것입니다. 주제는 필요조건입니다. 글을 만들어낼 때 부차적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지요. 글을 쓸 수만 있다면 어떤 주제든 좋은 주제입니다. 6년 동안, 나는 줄곧 '일기'라는 것을 썼습니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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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자리에 있지 않음으로써 내가 있을 곳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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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를 알게 된 이후로, 내가 어떤 것보다도 우선시했던 일에서 실패한 것을 어떻게 당신이 감당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보려고 나는 얼마동안이 될지 몰라도 당분간 몰두할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일에 눈 질끈 감고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흔들리지 않았고 조바심을 내지도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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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생각을 구조화하기 위해 이론이 필요했고, 구조화되지 않은 생각은 항상 경험주의와 무의미 속에 빠져버릴 위험이 있다고 당신에게 반박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대답했지요. 이론이란 언제든 현실의 생동하는 복잡성을 인식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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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내 거부의 산물이었고, 거부 자체였지만 세상에 나옴으로써 내가 더 이상 거부만을 고집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바로 그것이 내가 원했던 것이었으며 오직 책의 출간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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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여기에 있음으로써 다른 아무 곳에도 없음을, 이것을 함으로써 다른 것을 하지 않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이지, '결코'나 '항상'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 오직 이 생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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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다 말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아 있다. 언제나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을 것이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말하는 행위'이지 '말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가 이미 쓴 것보다 앞으로 이어서 쓸 수 있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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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열렬히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 이것은 누가봐도 너무도 평범하고 사적이고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소재로는 보편적인 것에 이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난파한 사랑, 불가능한 사랑은 고귀한 문학의 소재 아니겠습니까. 나는 성공과 긍정의 미학 속에서 편치 못했고, 실패와 소멸의 미학 속에서 비로소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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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는 그의 <일기> 어디에선가 이렇게 썼습니다. 항상 한 작품에서 쓴 것과 정반대되는 내용을 다음 작품에서 써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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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우리를 미래에 투사하지 말고 이번에야말로 정말 우리의 '현재'를 살아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가져온 어슐러 르귄의 책 두 권을 읽었습니다. 그 책 덕분에 이런 결심을 할 힘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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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본질적인 단 하나의 일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썼지요. 당신이 본질이니 그 본질이 없으면 나머지는, 당신에 있기에 중요해 보였던 것들마저도, 모두 의미와 중요성을 잃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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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ㅡ조르주 바타유의 표현을 빌리자면ㅡ '실존을 나중으로 미루'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는 내 앞에 있는 당신에게 온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걸 당신이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게 당신의 삶 전부와 당신의 전부를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동안 나도 당신에게 내 전부를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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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